솔직히 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냥 SF 소설 소재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이 제시한 시뮬레이션 가설은 세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첫째, 우리의 의식은 모두 계산으로 환원 가능하다. 둘째, 인류 문명이 발전하면 계산 능력이 엄청나게 증가한다. 셋째, 미래의 후손들은 선조를 시뮬레이션하고 싶어할 것이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참이라면, 우리가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을 확률이 실제 현실에 살고 있을 확률보다 높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1.우주에 걸린 '제한 속도'라는 설정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빛의 속도 제한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빛의 속도인 초속 30만km는 우주의 절대적인 속도 제한입니다. 어떤 물질도, 어떤 정보도 이 속도를 넘을 수 없습니다. 시뮬레이션 가설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이것을 게임의 '프레임 제한'에 비유합니다.
컴퓨터 게임을 만들 때 개발자들은 시스템이 과부하되지 않도록 여러 제한을 걸어둡니다. 예를 들어 스타크래프트에서 한 번도 탐험하지 않은 지역은 검게 가려져 있는데, 그 부분은 실제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SCV나 프로브가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비로소 렌더링이 시작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도 우리가 관측하지 않는 영역은 계산하지 않다가, 망원경으로 관측하는 순간 그제야 데이터를 생성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엔 이 비유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실제로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빛의 속도로도 태양까지 8분이 걸리고, 가장 가까운 별까지는 4년이 넘게 걸립니다. 만약 시뮬레이션을 설계한다면, 사용자가 접근할 수 없는 먼 우주까지 세밀하게 계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다운로드 속도 제한을 걸어서 "너희는 태양계 안에서만 놀아라"라고 소프트웨어 제약을 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플랑크 길이라는 '최소 픽셀'
두 번째로 주목할 만한 증거는 플랑크 길이입니다. 플랑크 길이는 약 1.6 x 10^-35 미터로, 현대 물리학에서 의미 있는 가장 짧은 길이 단위입니다. 이보다 작은 길이는 물리적으로 측정이나 정의가 불가능합니다. 시뮬레이션 지지자들은 이것을 컴퓨터 화면의 '픽셀'에 비유합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아무리 확대해도 결국 사각형 픽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픽셀보다 작은 단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에도 최소 단위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주가 연속적인 실체가 아니라 불연속적인 디지털 데이터로 구성되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설명을 들었을 때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가 떠올랐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미시 세계를 연구하다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물리량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니 '행렬(matrix)'로 나타났습니다. 행렬 곱셈은 교환 법칙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5 곱하기 3과 3 곱하기 5는 일반 숫자에서는 같지만, 행렬에서는 순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제목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매트리스(침대)로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수학 용어인 '행렬'을 뜻합니다. 미시 세계가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인 행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즉 디지털 세계라는 암시가 제목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3.계산주의와 의식의 문제
시뮬레이션 가설의 핵심 쟁점은 결국 '의식'입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자유 의지까지도 모두 계산으로 환원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것을 '계산주의'라고 부릅니다. 계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시뮬레이션 가설이 논리적으로 가능해지지만, 거부하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신경과학이 발전하면서 뇌의 화학 작용과 전기 신호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식'이라는 주관적 경험이 순수하게 물질적 과정으로만 환원될 수 있는지는 논쟁 중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지금 단계에서 계산주의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엔 증거가 부족합니다.
실제로 2014년 하버드 대학교는 빅뱅 이후 1,200만 년부터 138억 년까지의 우주 역사를 시뮬레이션했습니다. 8,000개의 CPU로 3개월 동안 돌려서 우주의 진화 과정을 재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론 연구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초기 조건을 입력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린 뒤, 그 결과가 현재 우주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면서 과거를 역추적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반대 입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주 전체를 시뮬레이션하려면 우주 전체보다 더 큰 계산 능력이 필요하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또한 시뮬레이션 내부의 존재는 외부를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가설은 과학적으로 검증도 반증도 불가능합니다. 과학이라기보다는 현대판 신화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저는 이 논의 자체는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과 과학이 만나는 접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정말 시뮬레이션 속에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시뮬레이션이든 아니든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실이 가짜라는 생각에 빠지기보다는, 이런 질문을 통해 우주와 의식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더 건설적인 태도라고 봅니다.